사람들 사이의 관계 찾기가 필요한 이유
“우리가 확고하게 믿고 있는 어떤 것들의 이면이 궁금하다면 끝과 시작, 위와 아래를 뒤집어볼 것. 그것이 내 소설의 기조가 되어버렸다.”고 말하는 작가 이기호는 어느새 나와는 친숙한 사이가 되어버린 듯하다. 그의 사고방식뿐만 아니라 실제 그가 1972년 강원도 원주 태생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자랐다는 생각만으로도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쉽게, 재미있게, 마치 내 이야기인 듯 읽을 수 있다.
이번 작품집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는 40편의 아주 짧은 소설을 모은 것이다. 《차남들의 세계사》와 같은 예외도 있지만, 그의 작품들이 대부분 일상을 비트는 것에서 오는 묘한 웃음을 주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던 것과는 달리 이 책에는 고된 삶의 애잔함을, 바쁜 도시의 삶 속에서 느끼는 개인의 고독 등을 많이 담고 있다. 그러면서도 작가 특유의 능청스런 유머가 또 곳곳에서 발견되니 역시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그래서 그가 좋다.
많은 작품 중에서 〈비치보이스〉나 〈아파트먼트 셰르파〉 등은 이 시대 청년들의 고충을 담아내고 있다. 〈비치보이스〉 속 화자인 ‘나’와 친구인 덕진이, 춘길이는 군 입대를 앞둔 스물두 살의 백수들로 한 여름의 추억을 만들려 무작정 바닷가로 떠난다. 그러나 여행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시작한 주차장 아르바이트에서 세 사람은 겨우 이틀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둔다. 그리고 ‘갑’과 ‘을’의 관계를 뼈저리게 느낀다. 이들도 그 나이또래의 평범한 젊은이들처럼 자신들의 청춘을 위한 작은 사건을 만들고 싶었을 뿐인데 현실은, 아니 세상은 결코 이들을 도와주는 법이 없다. 주차장 사장은 세 사람의 처지를 이용해 두 사람 몫의 비용으로 세 사람을 고용하고, 살인적인 근무환경 속에서도 이들을 혹사시켜 결국 제 스스로 그만두게 만든다. 게다가 무상제공인 줄 알았던 식대와 숙박비까지 임금에서 제한다. ‘나’는 그런 사장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참고 있다. 그리고 저 너머 해변에선 ‘사람들’이 즐겁게 미소를 짓고 있다.
〈내 남편의 이중생활〉은 〈아내의 방〉과 더불어 현대인의 소통부재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아내의 방〉에서 남편은 아내가 전부터 점점 말이 없어지고 베란다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더니 어느 순간 그곳에서 마저도 사라져버린 것을 발견한다. 그에 반해 〈내 남편의 이중생활〉에서는 아내가 자신과는 일체 대화가 없는 남편이 휴대폰을 통해 SNS에 자신의 사생활을 (거짓으로) 공개하며 소통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불안해한다. 일견 우습게 들릴 수도 있는 아내의 넋두리가 그렇지만도 않은 것은 이들 부부의 모습에서 어쩌면 우리 가족들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항상 삶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미드나잇 하이웨이〉에서는 사업실패로 가족과도 이별한 ‘내’가 죽기를 결심하고 한밤에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어선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생선장수에 의해 ‘라이터’를 빼앗기게 되고, 자살 도구를 잃어버린 그에게 생선장수는 같이 고등어나 구워 먹자고 권유한다. 그 순간 ‘나’의 눈에 뚝뚝 눈물이 흐른다. 또 다른 단편 〈우리에겐 일 년 누군가에겐 칠 년〉에서도 ‘나’는 한밤중에 차를 몰고 산길을 달린다. 그동안 ‘나’를 대신해 십육 년간 어머니의 곁을 지켰던 봉순이의 사체를 아버지의 묘 옆에 묻기 위해서다. 그는 몰티즈 한 마리 때문에 굳이 이 일을 해야 할까 고민하지만 어머니의 설명에 곧 수긍한다. 죽기 전 일 년 동안 치매에 시달리면서도 어머니의 곁을 지켰던 봉순이에게 마치 큰 빚을 진 것만 같아 묵묵히 삽질을 계속한다.
이 책의 제목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는 바로 이렇듯 강퍅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그동안 잃어버리고 살았던 인간성을 찾는다면 어떻게든 버텨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현실은 힘들고 미래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일지라도 인간(人間)이기에,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회복해 나간다면 조금씩이나마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4〜5쪽 정도의 짧은 글들로도 충분히 이런 희망을 전하는 글을 쓸 줄 아는 작가의 능력이 정말 부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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